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메리 여왕(스코틀랜드) (문단 편집) === [[프랑스 왕국]]의 [[왕비]] === 메리는 프랑스 발루아-앙굴렘 왕실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자신의 지적, 예술적 재능을 발휘했다. 우아한 매력을 지닌 그녀를 왕세자인 약혼자 [[프랑수아 2세]]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족 대부분과 궁정에 출입하는 예술가들 모두 사랑하여 찬미했다고. 메리는 16세 때 프랑수아와 결혼해 [[왕세자비]]가 됐고, [[앙리 2세]]가 1559년에 사망하여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하자 마침내 프랑스의 [[왕비]]가 되었다. [[시어머니]]인 왕대비 [[카트린 드 메디시스]]는 처음에는 똑똑하고 예쁜 맏며느리를 매우 총애해서 자신이 시집올 때 예물로 가져왔던 당대에 가장 비싼 [[진주]]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. 하지만 메리는 정작 벼락출세한 메디치 가문 출신인 왕대비 카트린을 시종일관 무시했으며, 급기야 여러 사람 앞에서 카트린을 '''"[[피렌체]] 출신의 장사꾼"'''[*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메디치 가문이 막대한 결혼 지참금을 지불할 경제력이 있다는 점, 교황과 연줄이 있다는 점, 프랑스 왕실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선호했다는 점 때문에 강대국 프랑스 왕족과 결혼할 수 있었다.]이라고 지칭하고 말아 결국 시어머니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. 그리고 결국 이 [[고부갈등]] 때문에 메리는 나중에 반란군에게 패해 망명해야만 했을 때 어머니의 고국이었던 프랑스로 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됐는데, 이 역시 메리 스튜어트의 자제력이 부족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겠다.[* 반대로 아들 [[제임스 1세]]는 꽤 자제력 있는 왕이었기에 자신에게 원한을 심어준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잘못도 덮어주어 그들의 지지를 받았다.~~그런데 손자 [[찰스 1세]]는 메리 여왕을 닮았는지 [[청교도 혁명|결국...]]~~] 한편 메리가 장신에 건강한 미인인 반면, 그녀의 첫 남편인 [[프랑수아 2세]]는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어 왜소하고 매우 병약한 남자였다.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는 사실상 소꿉친구나 다름 없었던 프랑수아를 진심으로 사랑해서, 이들 [[부부]]는 금실이 매우 좋았다. 그리고 이는 메리의 외가였던 기즈 가문의 세력이 강해지는 결과를 낳았다. 덕분에 일시적으로나마 기즈 가문의 세력이 카트린을 능가하는 사태가 벌어졌고, 이 역시 카트린이 메리를 곱게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. 하지만 즉위 1년 6개월 만에 [[프랑수아 2세]]가 요절한데다, 프랑수아 2세가 워낙 허약한 탓에 16세에 죽어 후사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,[* 훗날 메리의 2번째 남편인 [[헨리 스튜어트]](단리 경)가 메리와 처음으로 동침한 후에 "여왕은 [[숫처녀]]였다."고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녔다는 야사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, 프랑수아가 메리와 합궁 자체를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. 한편 일부 전기 작가는 "메리와 프랑수아가 당시에 모두 어린데다, 메리에게 프랑수아는 남편보다는 돌봐줘야 할 병약한 친구라는 인식이 커서, 성적으로 끌리지 못했을 것"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.~~동정혼~~] 메리는 사별하면서 프랑스 왕실에 연고가 끊어지게 됐다. 프랑수아 2세의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, 당시 10살에 불과했던 시동생 [[샤를 9세]]가 즉위하여 시어머니 카트린이 섭정하게 되었다. 카트린은 그동안 아니꼬워하던 며느리 메리를 ~~깡촌인~~ 스코틀랜드로 쫓아내듯이 보내버렸다. 외가인 기즈 가문의 친척들이 몇몇 새 남편 후보를 추천했지만, 메리가 프랑스에 남을 것을 우려한 카트린이 나서서 전부 무산시켰다. 한편 메리를 대신해 섭정하던 마리 드 기즈도 1560년에 숨졌기 때문에, 스코틀랜드의 모든 신료들은 메리의 귀환을 요청하고 있는 상태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